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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경찰·공무원 거쳐 방송 진행자로

걸어온 삶 자체가 다양성과 포용성을 담아낸다.   이러한 배경이 한인 여성을 TV쇼 진행자의 자리로 이끌었다.   온라인 뉴스 매체 패치닷컴은 현재 라구나힐스, 다나포인트 지역 등의 수도 시스템을 관리하는 몰턴니구엘수도국 최고경영자(CEO)인 한인 준 김 로페즈씨가 오렌지카운티 지역 비영리 방송사인 ‘OC월드’의 프로듀서이자 진행자로 선임됐다고 14일 보도했다.   김 로페즈씨의 이력은 화려하다. 신문 기자, 공무원, 경찰관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민자의 딸로서 LA 폭동을 경험했고, 경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약 단속반에서 훈장까지 받았다.   김 로페즈씨는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성장기에 겪은 많은 어려움 때문에 연민을 느끼고 어떤 일에 공감하기를 좋아했다”며 “나, 타인, 그리고 주변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즐거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인 1979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왔다.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라서 학교에서 괴롭힘도 당했다.     김 로페즈씨는 “그때는 ESL 수업도, K팝도 없었기 때문에 언어와 미국 문화를 모른 채 학교에 다니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며 “그때 부모님이 LA에서 히스패닉 거주 지역에 신발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때부터 어린 나이에 신발을 팔며 영어와 스패니시를 익혔다”고 말했다.   그는 본래 꿈이 언론인이었다. UC샌디에이고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스페인 문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결국 희망대로 졸업 후 한 지역 신문사에서 기자로 채용돼 펜을 잡았다. 현장을 누비고 싶어했던 그는 곧 펜을 내려놓아야 했다.   김 로페즈씨는 “부모님이 LA 폭동으로 신발 가게를 잃게 됐고 나는 순식간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기 위해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며 “그때 패서디나시의 정부 보조금 관리자로 채용돼 공무원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가게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친절하고 근면했다. 당시 보조금 지원 부서 옆에서 함께 근무하던 경찰관들이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던 김 로페즈씨를 눈여겨보다가 경관직을 권유했다.   그는 또 한 번 길을 바꾸기로 했다. 경찰학교로 진학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경관이 됐다.     김 로페즈씨는 짧은 경력에도 곧바로 현장 훈련 교관으로 선임됐고 이후 패서디나 경찰국 최초의 여성 총기 교관을 역임한 뒤 마약단속반에서 수사관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마약밀매 조직원들과 총격전 도중 총상을 입으면서도 용의자를 체포, 은성용맹훈장까지 받았다.   경관 생활은 7년 만에 마무리됐다. 당시 결혼 때문에 경관을 그만두고 수도국에 입사했다. 센트럴 시립수도국(매니저), 애플밸리랜초스수도국(부국장), 칼라베라스카운티수도국(국장)을 거친 뒤 현재까지 몰턴니구엘수도국 최고경영자로 활동 중이다.   OC월드의 TV쇼 진행자를 맡게 된 건 우연이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레스토랑에서 예약 좌석을 기다리던 중 팟캐스트에 대해 한 낯선 남성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OC월드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설립자인 스콧 헤이스였다.   스콧 헤이스 프로듀서는 “수도국에서 일해서 그런지 물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고 정말 흥미진진하며 역동적인 사람이었다”며 “이후 점심에 김 로페즈씨를 초대했고 방송 진행자 자리를 제의했다”고 말했다.   김 로페즈씨는 “방송을 통해 오렌지카운티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그는 정치인, 기업가, 자선사업가 등 할 것 없이 다양한 이들을 인터뷰하며 의료 문제, 수질 문제, 가정 폭력 등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논한다. 김 로페즈씨의 방송은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가운데 최근에는 ‘제73회 골든 마이크 어워드’에서 최우수 프로그램 상도 받았다.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로페즈 오렌지카운티 지역 tv쇼 진행자 지역 신문사

2023-09-17

[김창준] 하수처리 전문 업체 창업 주류사회 진입 느낌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0〉사업가로 성공하며 미국 정착   신문 배달하며 USC서 토목공학 전공 한인정치협(KAPA) 조직 정치 눈 떠   유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국제관계 연구 동아리였다. 그런데 모임에 가는 게 큰 부담이었다. 영어가 안되니까 그들의 토론내용을 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토론을 벌이며 무언가 개선하려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한국 교육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학생들은 각 나라 외교정책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주제였다. 때때로 토론에서 코리아도 나왔다. ‘세계 속에 한국이 있구나.’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당시 한국 역사와 나의 존재를 놓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부정선거에 항거해 목숨을 내걸고 구름 떼처럼 경무대(현 청와대)로 치닫던 학생들 무리를 보고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먼 미국에 오니까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아리 회장을 새로 뽑는다고 했다. ‘내가 나가봐야지.’ 새로 들어온 신입 회원의 출마 선언에 다들 생뚱맞은 표정이었다. 정견발표를 준비해야 했는데 영어 소통이 잘 안 됐던 나로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던 한 백인 여학생을 찾아갔다. 정견발표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뒤 학교 신문에 나와 그녀 사진이 크게 실렸다. 우리 팀은 교내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결국 동아리 회장으로 덜컥 당선됐다. 그 여학생은 동아리 행사마다 나와 함께 늘 같이했다.     우리 파트너십은 이런저런 이유로 2년 임기 중 7개월 만에 깨졌다. 나로서는 영어가 더 절실해졌다. 여긴 미국이었다. 영어를 제대로 해야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V와 F, TH, Z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어느 날 신문을 소리 내 읽었다. 신문에 실린 주요 기사를 몇 번씩 소리 내 읽었다. 그렇게 영어 공부에 매달리자 유학생활 1년 만에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하루가 다르게 귀가 열리고 말문이 터졌다. 그래도 특유의 악센트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   그 무렵 지역 신문사 보급소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새벽 시간에 일해 낮에 공부하기 좋았다.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동안 단 하루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걸 좋게 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 책임자가 됐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수입이 늘었다. 병원 청소도 그만뒀다.     신문 보급소 일을 하면서 내가 가고 싶었던 USC 토목공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고들 한다. 그때 내 삶은 원대한 꿈을 갖고 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코앞에 닥친 현실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학부 공부를 하면서 미국과 미국 사회가 이해됐다. 그러다 보니 미국 친구도 사귀게 됐다.     토목공학은 적성에 맞았다. 이 분야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내 성격이 엔지니어에 적합하다는 걸 몰랐다. 공학은 기준을 세우고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모든 작업은 기준에 맞아야 했다. 그런 일이 내 성격과 잘 맞았다. 덕분에 좋은 성적으로 USC 졸업 뒤 곧바로 USC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환경공학으로, 상하수도 물 정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주경야독으로 조교까지 하면서 196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온 지 8년 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박사과정을 권했지만, 연구직은 내게 맞지 않았다. 주류사회에 나가 사업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마침 대학원을 마칠 무렵 미 전역에서 하수처리장 설치로 바쁠 때였다. 전공 분야라 좋은 직장에 금방 취직됐다. 신문사 아르바이트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하수처리 컨설팅 업체인 ‘제임스 몽고메리’에서 경험을 쌓은 뒤 직접 회사를 차렸다.   하수처리장 짓는 일은 주정부에서 발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으면서 업무상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났다. 하수처리장 수주를 잘 따기 위해 신문·잡지를 꼼꼼히 읽으며 정부에 관한 지식을 키워나갔다.   미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폐수처리 사업이 이어지다 보니 일거리가 쏟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부 지역을 날아다녔다.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더는 이방인이 아니고 미국 주류사회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엔지니어로 왕성하게 일하면서 일본계가 만든 아시아기업가협회(AAA)에 나가 활동했다. 얼마 뒤 일본계를 제치고 내가 AAA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일본계가 어떻게 미국의 주류사회와 소통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인들과의 교분도 이어갔다. 한인이 늘면서 한인들을 위한 이익단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무역업을 하던 배기성씨와 함께 1972년 한미정치협회(KAPA·카파)를 조직했다. 나는 2대 회장이 됐다. 우리는 카파의 첫 번째 사업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제리 브라운 당시 후보의 정치모금 파티를 열어 후원금을 걷어줬다. 브라운은 8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했다. 당시 최연소 주지사였던 그가 40년 뒤 다시 주지사직에 당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파 회원들은 정치 후원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됐다. 앞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2세들을 위해서라도 한인들이 더는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지만 그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지역구민들이 뽑는 주 의원, 시의원이라는 걸 실감했다.     정치 모금은 한인사회 의견을 주지사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이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하수처리 주류사회 영어 공부 지역 신문사 동아리 회장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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